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오와급 전함 (문단 편집) === 아이오와 2번 주포 폭발사고와 조사 비리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SS_Iowa_BB61_Iowa_Explosion_1989.jpg]] 주포가 폭발하는 아이오와 [youtube(uHSzYy-XLsU)] 1989년 4월 19일, [[푸에르토리코]] 북동쪽 해상에서 1번함 아이오와가 주포 사격 훈련을 실시했다. 1번 포탑이 전탄발사를 완료하고, 2번 포탑이 발사 준비를 했다. 3개의 포신 중에서 좌, 우는 장전 완료를 알렸으나 가운데에서 보고가 지연되었다. 그리고 장전 지시가 내려지고 1.5분 후에 2번 주포탑 중앙 주포가 폭발했다. 이 사고로 2번 포탑 요원 47명 전원이 사망했다. 탄약고로 이어지는 문이 폭발을 막아준 탓에, 아이오와는 침몰을 모면했다. 폭발 즉시 탄약고를 침수시켰으며, 외부에서도 포탑에 물을 뿌려서 1시간 30분 후에 진화가 완료되었다. 다음날인 20일에 포탑의 물을 펌프로 모두 퍼냈으며, 2번 포탑 요원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헬기를 통해 푸에르토리코로 옮긴뒤, 다시 항공기를 이용해서 미국 본토로 보냈다. 아이오와는 4월 23일에 노포크로 귀환하였으며, 24일에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에서 추모식을 치렀다. 같은 해 9월 7일에 미 해군 조사단이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여 발표하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병장[* GM2 계급. [[미군/계급]]의 미 해군 기준으로는 E-5이다.] 클레이튼 하트윅(Clayton Hartwig)이 다른 승조원과 동성애 관계에 연루되어 있었으나(involved in a homosexual relationship with another crew), 사랑이 좌절되자 자살하고자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원, 사망자들의 가족, 그리고 대중은 해당 결론의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다음해인 1990년 5월 25일 상원 청문회 도중에 미 정부 회계 감사원(GAO)과 샌디아 국립연구소(Sandia National Laboratories)가 내놓은 두번째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원래 16인치 주포는 탄두와 장약이 분리되어 있고 사거리에 따라서 각기 다른 숫자의 장약 뭉치를 포의 약실로 집어넣는 방식을 쓰는데, 이 과정을 사람이 직접 유압 기계를 조종해서 수행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실수가 벌어지면 포탄을 약실로 밀어넣는 밀대가 장약을 짜부러트려서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의적으로 폭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도 덧붙였다. 미 해군은 대중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재조사를 실시한다. 그해 10월 26일, 소련이 붕괴되자 아이오와급 전함을 퇴역시키기로 논의한다. 그래서 아이오와의 2번 주포탑은 수리되지 않은채로 남게 된다. 1991년 10월 17일, 펜타곤에서 열린 기자 회견을 통해 미 해군의 두번째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여기서 의도적으로 폭발시켰다는 증거를 찾지는 못했으나, 폭발의 원인도 특정하지 못했다고 발표된다. 공식적인 기록은 여기까지지만, 후의 조사 결과를 따르면 장교들이 벌인 인재였다. 자세한 내용은 [[http://en.wikipedia.org/wiki/USS_Iowa_turret_explosion|참조]]바람. 아이오와 급의 스티븐 스켈리(Stephen Skelley) 원사(MCPO)와 케네스 마이클 코스티건(Kenneth Michael Costigan) 소령(LCDR)은 아이오와급의 16인치 주포 사거리를 늘리려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원래 이는 해군의 해상 시스템 개발 사령부(NAVSEA)의 승인이 필요했는데, 둘은 새로 부임한 무샐리 함장에게 승인이 났다고 입을 털었고, 사령부의 민간인 직원인 존 매키렌(John McEachren)은 상사에게 자신이 임의로 승인했다는 사실을 숨겼다. 어쨌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를 위해서 장약을 '과급'해서 발사했는데, 1989년 1월 20일에 1번 포탑에서 6발을 발사할 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본인들의 주장으로는 40킬로미터를 날아가서 16인치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함 내에서 이 연구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낡은 전함으로 무슨 짓거리냐"는 반응을 보였다. 아이오와급 전함중 초도함인 아이오와는 당연히 4척의 자매함들중에서 노후화가 제일 심각했다. 현역에 다시 복귀할 때부터 모스볼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칠해놓은 보존제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등 불량한 후처리 상황 때문에 한번 부적합 판정을 받은 바 있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심지어 포탑 부품 대부분이 노후화 되었음에도 신품 부품들을 공급받을 수 없자[* 왜냐하면 당시 미해군의 주력 함포 자리가 이미 [[Mk.45 5인치 함포]]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당연히 몇년뒤 퇴역한다는 얘기가 공공연연하게 나오고 전세계에 겨우 27문 밖에 없는 Mk.7 16인치 함포를 위해 새로 생산라인을 깔고 부품을 공급해줄 방산업체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건조가 취소되어 재고로 쌓였던 낡은 부품들을 반쯤 어거지로 끼워 일단 작동은 되게 만들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아이오와급 전함들은 현대와 달리 둔감장약을 사용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억지로 장약을 집어넣을시 충분히 폭발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있었다. 1번 주포탑에서도 더 이상 협조하지 않겠다고 나오자, 스켈리는 2번 포탑에 접근해서 다시 실험을 재개한다. 그리고 폭발사고가 났다. 게다가 실험과정도 상당히 위험했다. 비공식적으로 16인치 포탄이 40킬로미터를 날아갔다고 관측된 후에 주포 청소를 위해 주포를 점검해보니 주포 사격시 차탄 장전을 위해 포미를 열기 전에 남은 장약 찌거기와 불똥을 포신 밖으로 밀어내는 압축공기 살포기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무리한 실험으로 포신과 포탑에 무리가 가기 시작한 것이다. 장약 선택에도 문제가 컸다. 원래 좀 더 가벼운 포탄을 날리기 위해 제작된 장약을 초중량탄 발사에 써먹으려고 실험한 것이다. 애초에 장약에 '''초중량탄 발사용으로 사용금지'''라고 적혀있기도 했고, 해당 장약은 좀 더 빠르게 발화되고 연소되므로 초중량탄에 사용하면 [[리슐리외급 전함]]인 리슐리외의 경우처럼 포탄이 장약폭발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깨져서 포신 내에서 유폭할 가능성이 있던 물건이었다. 그나마 장약이 정상적인 물건도 아니고 2차대전 기간에 생산된 후 오랜 기간동안 적절치 못한 곳에 보관한데다가 장약 자체가 비단주머니에다가 화약을 넣어놓은 것이라 포장 자체가 장기간 보관에 부적합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열화상태가 진행되는 바람에 본래보다 빨리 발화되고 유폭하기 쉬워졌으며 가만있어도 유폭하기 딱 좋은 분진을 뿜어대는 위험한 물건이 된 상태였다. 이러니 1번 주포탑에서 처음 실험할 때 유폭사고 안난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참조로 링크걸린 내용을 전부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이오와급의 해군 장교와 부사관들, 그리고 그들의 상사 제독들은 증거를 인멸하고, 과학자들의 접근을 차단했고, 지속적으로 민간 조사자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 목격자 인터뷰에서 자기네가 질문해놓고 답을 하면 '''녹음기를 끄고 주제를 바꿨다'''. 사고수습하며 시신의 위치도 남기지 않고 페인트까지 칠하며 '가능한 정상으로 보이게' 뒷처리를 해놨고, 망가진 장비들은 중요한 증거품이 될수 있음에도 '''모두 바다에 버렸다'''. 결정적으로, 중앙 탄두에서 나온 화약물질에 기반하여 화학물질을 이용한 의도적 폭파라는 자기들의 주장에 맞추기 위해 좌/우측 포탄을 창고에 숨겨놓고 없앴다고 주장했다. 발견 이후엔 보존명목으로 플라스틱 커버로 싼 후 의도적 점화의 증거품으로 들이댔다. * 의회에서 재조사 지시로 Sandia 연구소의 조사팀도 참가시켰으나, 그들의 실험요청은 모조리 무관하다고 씹고 자기들의 실험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해군 조사팀 리더는 1, 2, 3번 재조사 내내 저 첫 억지주장을 들이댄 둘 중 하나인 Miceli가 했다(...) * During Meyer's interview by Milligan and his staff, Meyer described Skelley's gunnery experiments. Meyer stated that Moosally and Kissinger had allowed Skelley to '''conduct his experiments without interference or supervision'''. At this point, according to Meyer, Messina interrupted, told the stenographer to stop typing, and took Meyer out into the passageway and told him, ''' "You little shit, you can't say that! The admiral doesn't want to hear another word about experiments!" ''' ...실험을 어떠한 간섭이나 감독없이 수행했고... ..."이 개새끼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 2차 재조사 펜타곤 공개 발표 때에도 같은 억지 주장을 하며 Sandia 연구팀을 못 나오게 막고 자기 혼자 발표했다. 그전에 Sandia가 조사팀에서 Miceli를 빼달라했으나 해군이 거부했고, 예상대로 그는 실험수정을 모두 거부하며 질질 시간을 끌었다. 샌디아 연구소가 주도한 2차 해군 2번째 재조사(즉 3차) 발표 때 [[해군참모총장#s-3]] 프랭크 켈소(Frank B. Kelso II)가 "해군은 '''250억 달러'''를 들여 어떠한 주장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도 찾지 못했다." 라고 하며 해군이 더이상 해군 인사를 조사단에 넣지 못하게 조치했다고 했다. 이후 아이오와의 책임자들은 징계를 받았으나, 공식 기록에 남지 않는 훈계 편지로 그쳤다. 이후의 처벌은 대체로 솜방망이다. * 무샐리 함장은 승진을 앞두고 있었으나 언론인이 [[제러미 마이클 보더]] 제독[* 당시 인사참모부장(Chief of Naval Personnel)이었다.]에게 이런 사실을 아느냐고 질문을 던지자, 승진 명단에서 짤렸다. 1990년 5월에 대령으로 전역하고 록히드 마틴에 취직한다. * 1차 해군 조사를 지휘한 밀리건은 해군 대학 교수가 되었다가, 보험회사 부사장으로 이직한다. * 연구 당사자였던 스켈리는 전함 위스콘신으로 자리를 옮겼고, 걸프전에서 위스콘신이 포격하는 과정에 참여한다. 이후 1998년에 전역한다. 코스티건 중령과 스켈리 원사는 시대에 뒤떨어진 열광적인 전함 덕후였고, 이 둘의 대형 사고를 끝으로 소련 붕괴 이후의 유용성에 물음표가 붙던 아이오와급이 퇴역하고 한줌도 안남은 미 해군의 전함 파벌도 완전히 사라진다. 이후 항공파 제독들의 [[아스널쉽]] 비난에 휘말려서 아이오와급 전함도 제적되기 시작한다. 국방허가법 제1011항의 2척의 아이오와급 전함을 유지하라는 내용 때문에 아이오와와 위스콘신이 유지될 예정이었으나, 상기한 사고로 뉴저지가 아이오와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게 뉴저지와 위스콘신은 유지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스볼 처리였으나 법은 여전히 아이오와를 유지하라는 상태였다. 미주리는 자신을 현역으로 유지하라는 법이 없고 현실적인 이유도 없던 탓에 역사적인 중요성을 이유로 제일 먼저 박물관 행이 된다. 1999년에 the Strom Thurmond 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이 제정되면서 아이오와와 위스콘신을 유지해야 했고, 퇴역한 아이오와급 전함은 상업적인 용도(즉 고철로도 팔지 못한다.)가 금지된 탓에 뉴저지가 박물관함으로 가게 된다. 이를 시작으로 모든 아이오와급이 하나하나 박물관행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아이오와 2번 주포탑 폭발사고는 여타 사고처럼 함선이 파손되는 '사소한' 사건이 아니라 인권유린 및 해군의 비리가 엮인 큰 사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